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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처음처럼'혹은'희망 없이'

#78. '처음처럼'혹은'희망 없이'

5월에 출간소식이 자주 들렸다. 언젠가는 내 책을 한 번 써보겠다고 벌써 여러 해 준비(?)중인 예비 작가로서 책 출간 소식은 특히 눈에 띈다. 5월은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만큼이나 향기로운 출간소식이 넘쳤다. <마음을 쓰다>라는 시집 출간 소식과 <바람이 부는 순간>의 여행기 출간 소식에 글쓰기 책 <심플>, 그리고 처음으로 ‘전작읽기’에 도전을 하게 해 준 해이수 소설가의<눈의 경전> 장편소설 출간소식까지. 타인의 출간소식은 가끔 나를 불안하게 하고 조급하게 하지만 그대로 행복하다.

벌써 몇 해, 내 책 쓰기는 지지부진 하다. 자신을 늘 의심하고 엎기를 여러 번.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를 했던 만큼 “도대체 언제 책이 나오느냐?” “지금도 책을 쓰고 있느냐?”는 질문에 짜증도 난다. 손에 닿을 것 같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책 쓰기는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해 이수 소설가의 말처럼 ‘욕망에 시달리는 내가 보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나와의 전쟁. 그러나 역시 책을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고 그 스트레스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해 이수 소설가의 <눈의 경전>을 읽고 비로소 그 혼돈의 길 위에서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자신을 본다. <눈의 경전>은 해이수의 ‘내추럴 본 여행자’의 실패한 삶의 기록이라 회자된다.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 서울을 거쳐 히말라야까지 이어지는 주인공의 여정은 그 자체로 어느 곳에도 정착 불가능한 고독한 영혼의 실패와 고통의 서사'를 담았다. 소설가 박 상우의 평처럼 소설가 해 이수의 통과의례처럼 보였다. 또 다른 경계를 넘어야 하는 성장의 통증. 소설은 급히 읽혔고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렀다.

문학의 상상과 암울한 현실 사이에서 내내 방황했고 상처뿐인 관계의 연속에서 많이 갈등하고 번민했다. 그 관계를 의심했고 의기소침했으며 도피하고 싶었다. 이때 <눈의 경전>을 통해 던져준 소설가의 한 마디. ‘왜 몰랐을까? 관계가 상처를 먹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모든 관계는 상처를 먹고 자란다. 상처를 먹지 않으려는 것은 이미 성장할 수 없음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가가 4년여의 긴 세월동안 느꼈던 창작의 고통. ‘나는 울고 싶지만 신은 내게 쓰라고 하네.’ 라는 ‘화두’를 기억하고 ‘신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맡기기 전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시험한다.'를 인정하기로.

한 동안 ‘관계는 상처를 먹고 성장한다는 사실을’이란 문장은 내 ‘화두’가 되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헤매었던 책 쓰기에 실타래를 풀 수 있었다. '관계가 상처를 먹는 성장'임을 인정하고 현실에서의 타협을 시도하자 나의 책 쓰기 실타래 또한 쉬이 풀렸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듯 처음으로 돌아 와 있는 자신을 본다. 처음 내가 품었던 생각, 책 쓰기를 이렇게 하고 싶다는 이런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 속으로 들어 와 있었다.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행복한 책 쓰기의 출발점으로.

한 동안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 것인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 ‘왜 그 일을 하고 싶은 건가?’ ‘자본을 배재하고 난 다음에도 이 일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일까?’라는 생각 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어떤 일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나는 다시 돌아와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가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을 얻기위해 급기야는 그것으로 무엇을 보이기를 희망하는 따위로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해도 아무런 희망 없이 이뤄지는 일이라 해도 나는 그것이 좋고 그것을 해야만 행복하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내 첫 마음이 그랬다는 것을. 아무런 희망 없이 시작 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나는 희망 없이 책 쓰기를 시작한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나를 다그치지도 않는다. 이미 그것은 희망 없는 일임을 전제하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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